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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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는 근대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 철학자, 설교자이다. 1768년 프로이센의 브로츠와프에서 태어나, 모라비아 학교와 할레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베를린에서 낭만주의 학자들과 교류하며 종교의 본질을 감정으로 규정한 《종교론》을 발표했고,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는 독일 민족 정신을 고취하는 설교로 명성을 얻었다. 베를린 대학교 설립에 참여하여 신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1834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슐라이어마허는 신학, 해석학, 철학, 윤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특히 종교적 감정을 강조하는 신학으로 근대 자유주의 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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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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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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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프리드리히 다니엘 에른스트 슐라이어마허 |
출생일 | 1768년 11월 21일 |
출생지 | 프로이센 왕국, 프로이센 슐레지엔, 브레슬라우 |
사망일 | 1834년 2월 12일 |
사망지 | 프로이센 왕국, 브란덴부르크주, 베를린 |
로마자 표기 | Friedrich Schleiermacher |
학력 및 경력 | |
모교 | 할레 대학교 (1787–90) |
소속 기관 | 할레 대학교 (1804–07), 베를린 대학교 (1810–34) |
주요 관심사 | 신학, 심리학, 신약성경 주해, 윤리학(철학 및 기독교), 교의 및 실천신학, 변증법(논리학 및 형이상학), 정치학 |
사상 | |
학파 | 독일 관념론, 예나 낭만주의, 베를린 낭만주의, 낭만주의 해석학, 방법론적 해석학 |
주요 아이디어 | 해석학 (순환 과정), 소크라테스 문제 |
영향을 준 인물 | 칸트, 슐레겔, 피히테, 셸링, 에르네스티, 게오르크 안톤 프리드리히 아스트,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볼프,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스피노자, 플라톤 |
영향을 받은 인물 | 딜타이, 바르트, 불트만, 틸리히, 위버베크, 가다머 |
제자 | |
주요 제자 | 아우구스트 뵈크, 프리드리히 아돌프 트렌델렌부르크 |
2. 생애
1768년 11월 21일 실레시아의 브레슬라우(현 폴란드 브로츠와프)에서 태어난 슐라이어마허는 개혁교회 군목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할레 근처 바르비와 상루사티아 북부 니스키의 모라비아 학교, 헤른후트 형제단의 마그데부르크 신학교에서 공부했다. 1787년 할레 대학교로 옮겨 요한 아우구스투스 에버하르트에게서 볼프의 철학을 배웠다.
1790년 신학 시험에 합격한 후 슐라이어마허는 프리드리히 알렉산더 추 도나 백작 가문의 가정교사로 일했다. 1794년 개혁교회 설교자 요한 로렌츠 슈만의 조수가 되었으며, 1796년에는 베를린 샤리테 자선 병원의 목사가 되었다. 1804년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의 신학 교수가 되었고, 같은 해 할레 대학교로 이적했지만, 1806년 할레 대학교가 폐쇄되었다.
1811년 베를린 대학교 설립에 참여하여 초대 신학부장이 되었고, 1834년 폐렴으로 사망할 때까지 베를린에서 활동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는 독일 민족 정신을 고취하는 설교로 루터 이후 최대의 설교자로 칭송받기도 했다.[38]
2. 1. 초기 생애와 교육
1768년 11월 21일, 슐레지엔 지방 브레슬라우(현 폴란드령 브로츠와프)에서 개혁교회 군목인 고틀리프 슐라이어마허의 아들로 태어났다.[8][9] 할레 근처의 바르비와 상루사티아 북부의 니스키에 있는 모라비아 학교에서 교육받았다. 그러나 경건주의성격의 모라비아 신학은 날로 늘어만 가는 그의 회의를 해소시키지 못했고, 그의 아버지는 마지못해 그에게 할레 대학교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해주었다.[31] 당시 할레 대학교는 이미 경건주의를 포기했고,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볼프와 요한 잘로모 젬러의 이성적인 정신을 채택하였다.신학생으로서 슐라이어마허는 교과과정과는 별도로 나름의 책읽기에 전념했으며 구약성서와 중동 지역의 언어에 대한 공부는 무시했었다. 그러나 젬러의 강의에 참석하면서 신약성서에 대한 역사비평[37]을 공부하게 되었고, 요한 아우구스투스 에버하르트의 강의를 통해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슐라이어마허는 학생 시절 깊은 회의론을 키웠고 곧 정통 기독교를 거부했다.[10] 그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신앙은 신성의 권위라고 당신은 말합니다. 아! 사랑하는 아버지, 이 신앙 없이는 다음 세상에서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이 세상에서 평안을 얻을 수 없다고 믿으신다면—그리고 당신의 믿음이 그렇다는 것을 압니다—아! 그렇다면 저에게 그것을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주세요. 저에게는 이제 그것이 사라졌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인자라고 부른 그가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라고 믿을 수 없습니다. 저는 그의 죽음이 대속이었다고 믿을 수 없습니다."[11]
2. 2. 목회 활동과 저술
1790년 신학 시험에 합격한 후, 슐라이어마허는 프리드리히 알렉산더 추 도나 백작 가문의 가정교사로 일했다. 1794년에는 개혁파 설교자 요한 로렌츠 슈만의 조수가 되었다. 1796년, 베를린 샤리테 병원의 목사가 되었다. 베를린에서 슐라이어마허는 카를 빌헬름 프리드리히 폰 슐레겔 등 독일 낭만주의 학자, 문학가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철학적, 종교적 사상을 발전시켰다. 이 시기에 그는 엘레오노레 크리스티아네 그루노와 7년간 관계를 맺기도 했다.[31]1799년,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론》(''종교에 관하여: 교양 있는 경멸자들에게 보내는 연설'')을 출판하여 종교의 본질을 행위나 이성이 아닌 감정으로 규정하고, 당시 종교에 대한 왜곡된 인식에 맞서 기독교를 변증했다. 이 책은 이후 그의 신학 체계의 기초가 되었다. 1800년에는 《모놀로그》(''독백'')를 통해 정신의 자유와 독립, 개인과 사회의 미래에 대한 자신의 윤리적 이상을 제시했다.[31]
1802년부터 1804년까지 슐라이어마허는 포메라니아 지방 스톨프에 있는 작은 개혁 교회의 목사로 재직했다. 1803년에는 『지금까지의 윤리설에 대한 비판의 개요』를 저술하여 칸트와 피히테를 포함한 이전의 모든 윤리 체계를 비판하고, 플라톤과 스피노자의 윤리 체계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31]
1804년, 슐라이어마허는 할레 대학교의 설교자 겸 신학 교수가 되었고, 1807년까지 재직했다. 이 시기에 그는 해석학 강의(1805–1833)를 시작했으며, 1806년에는 대화 형식의 저술 'Weihnachtsfeier'('크리스마스 이브: 강생에 관한 대화')를 출판했다.[31] 예나 전투 이후 그는 베를린(1807)으로 돌아와 트리니티 교회의 목사로 임명되었고, 1809년에는 앙리에트 폰 빌리히와 결혼했다.
1810년, 슐라이어마허는 베를린 대학교 설립에 참여하여 신학 교수가 되었고,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의 서기가 되었다. 그는 프로이센 교회의 재조직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루터교와 개혁 분파의 연합을 옹호하여 1817년 프로이센 교회 연합의 길을 열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는 독일 민족 정신을 고취하는 설교로 루터 이후 최대의 설교자로 알려졌다.[38] 그는 애국자 에른스트 모리츠 아른트와 함께 "선동적인 선동" 혐의로 프로이센 정부에 의해 기소되기도 했다.[31]
1821-1822년, 슐라이어마허는 그의 대표작인 《기독교 신앙》(''복음주의 교회의 원리에 따른 그리스도교 신앙'')을 출판했다. 이 책에서 그는 종교적 감정, 즉 예수가 교회를 통해 전달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의 감정을 신학의 기초로 제시하고, 성경의 신조나 문자, 합리주의적 이해가 아닌 종교적 감정을 강조하며 개신교 신학을 개혁하고자 했다.[31]
2. 3. 말년
1811년, 베를린 대학교 교수이자 초대 신학부장을 역임했다. 1829년 외아들 나다니엘을 잃는 슬픔을 겪었다.[38] 1834년 2월 12일, 폐렴으로 베를린에서 사망했다.[38]3. 사상
슐라이어마허는 근대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종교론》(1799)과 《신앙론》(1821/22, 2판: 1830/31)이 있다. 그의 사상은 20세기 신학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에도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슐라이어마허는 인간을 '주체'로 파악한 최초의 신학자였다. 여기서 주체는 모든 것을 지탱하는 근원을 의미하며, 이 주체로서의 인간은 모든 삶과 사유의 중심이다. 따라서 종교는 외부의 힘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경험과 감정을 통해 이해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교리를 중시하는 정통주의와 결별하고,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슐라이어마허는 당시의 철학적 사상을 수용했다. 그는 스피노자의 범신론적 사유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신' 대신 '우주'라는 개념을 사용했으며, '세계정신', '인간성', '역사발전'과 같은 당대 정신사의 주요 개념들을 수용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개념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근대 정신을 수용하면서도 비판하는 신학을 제시했다.
자유주의 신학(자유주의)의 시조이자 "근대 신학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슐라이어마허는 낭만주의 신학자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종교론』에서 "종교의 본질은 지식이나 행위가 아니라 직관과 감정이다"라고 주장하며, 감정을 중심으로 한 신앙 개념을 제시했다. 또한 근대 성서 해석학을 대표하는 인물로도 평가받는다.
철학적으로는 독일 관념론에 속하는 사상가로, 해석학의 시조로도 불린다. 그는 문헌학, 성서 해석학, 법 해석학 등 다양한 분야를 넘어 일상 언어까지 포함한 언어적 소산의 "이해"에 관한 일반 해석학 이론을 제시했다.
슐라이어마허는 신학 사상의 중심을 인간 외부에 있는 초자연적 현실이 아닌 인간 자신 안에 존재한다고 보았으며, 경직된 정통주의와 합리주의적이고 도덕을 설교하는 입장에 맞서 싸웠다.
그는 변신론(theodecy)의 문맥에서 주지주의와 주의주의라는 대립 축을 제창했다.
3. 1. 신학
슐라이어마허는 인간의 종교 체험과 감정을 신학의 중심으로 보았다. 그는 종교를 "절대 의존의 감정"으로 정의하고, 기독교 신앙을 이 감정의 표현으로 이해했다.[31] 그는 전통적인 교리나 성서의 문자적 해석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의 감정을 강조했다.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은 근대 자유주의 신학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20세기 신학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는 주지주의와 주의주의라는 대립 축을 제창하여 변신론에 접근했다.슐라이어마허는 종교를 인간의 종교 체험과 감정으로 생각하였으며, 기독교의 전통 교리와 신앙고백(Creeds)를 절대시하지 않았다. 신학보다 인간의 종교 체험과 감정을 더 우선시한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은 근대 자유주의 신학의 주요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다.[39]
슐라이어마허는 삶의 다양한 시기에 종교적 감정의 특성과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서로 다른 용어를 사용했다. 초기에는 이를 우주의 감정 또는 직관, 유한하고 일시적인 것 안에서 이성과 자연의 통일성, 무한하고 영원한 것에 대한 의식이라고 불렀다. 말년에는 절대적 의존의 감정, 또는 같은 의미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의식이라고 묘사했다.[31] 그의 저서 ''종교에 대한 연설'' (1799)에서 그는 종교가 인간의 깊은 필요에 부응하며, 형이상학도 도덕도 아닌 직관과 감정이라고 했다.[32]
그는 우주와 그 전체의 범주를 통해 성서의 God를 이해하려 했다. 우주에 대한 의존을 자각하고 있는 인간 안에서,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완전히 부정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고 보고, 이러한 의식이 희미해지는 것을 죄로 여겼다.
3. 2. 해석학
슐라이어마허는 해석학을 특정 분야에 국한된 기술이 아닌, 보편적인 이해의 기술로 발전시켰다. 그는 텍스트를 저자의 내면적 생각과 언어적 표현의 결합으로 보았고, 텍스트 해석을 위해 문법적 해석과 심리적 해석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7] 문법적 해석은 텍스트의 언어적 측면을, 심리적 해석은 저자의 의도와 사상을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17] 슐라이어마허는 "저자가 자기 스스로를 이해한 것보다 훨씬 더 잘 이해해야 한다"는 유명한 주장을 통해, 해석자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했다.[40]슐라이어마허는 생전에 해석학에 관해 광범위하게 출판하지는 않았지만, 이 분야에 대해 널리 강의했다. 그가 이 주제에 관해 출판했거나 출판하지 않은 저작들은 사후에 수집되어 1838년에 ''해석학 및 비평, 특히 신약성경과의 관계''(Hermeneutik und Kritik mit besonderer Beziehung auf das Neue Testament)으로 출판되었다. 하인츠 키머레(Heinz Kimmerle)가 1959년에 편집한 판본[13]은 "원래의 필사본을 주의 깊게 베껴 쓴 것을 바탕으로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 이론에 대한 확실하고 포괄적인 개요를 제공하게 되었다."[14]
슐라이어마허는 성경 해석에 관심이 있었지만, 모든 텍스트에 적용할 수 있는 해석 시스템을 구축한 후에야 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과정은 체계적이거나 엄격한 문헌학적 접근 방식이 아니라 그가 "이해의 기술"이라고 부른 것이었다.[15] 그는 텍스트를 저자가 텍스트를 만들기 전에 가졌던 생각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보았다.[16] 텍스트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해석자가 저자의 내면의 생각과 텍스트를 쓸 때 사용한 언어를 모두 고려해야 한다. 다시 말해, 독자는 이해 대상(텍스트)의 현실에 몰입해야 한다. 텍스트 해석에 대한 이러한 접근 방식에는 "문법적 해석"과 "심리적(또는 기술적) 해석"이 모두 포함된다.[17]
이해의 기술 중 일부는 오해를 피하는 기술이다. 슐라이어마허는 두 가지 형태의 오해를 식별했다. ''질적 오해''는 문법적 해석의 실패, 즉 텍스트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며, ''양적 오해''는 기술적/심리적 해석의 실패, 즉 저자의 "영역"에서 뉘앙스를 오해하는 것이다.[22]
슐라이어마허는 저자의 생각을 저자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해석은 단지 근사치일 뿐"이며 해석학은 "완벽한 기술"이 아니라고 인정한다.[25] 그러나 텍스트에 대한 해석자의 이해 정도는 텍스트를 오해할 가능성에 의해 제한된다.
그는 "예견법"과 "비교법"을 통해 텍스트의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직접 이해해야 할 대상에 대해 그 개성을 파악하는 "예견법"과 이해해야 할 대상을 포함하는 큰 보편을 설정하고, 그 안에서 같은 보편에 속하는 다른 대상과 비교하여 이해해야 할 대상의 개성을 탐구하는 "비교법"을 이용, 이 두 방법의 연속적인 순환 속에서 문체와 작가의 개성에 각각 두 방향에서 접근함으로써 풍부하고 발전적인 이해의 가능성을 찾고자 했다.
슐라이어마허의 연구는 해석학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쳐, 그는 종종 "일반적인 연구로서의 현대 해석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27] 그의 연구는 특정 학문(예: 법학 또는 신학)과 분리된 일반적인 탐구 분야로서의 해석학의 시작을 알린다.[28] 20세기에 하이데거, 가다머와 같은 철학자들은 텍스트 표현 해석 이론에서 삶의 경험 해석 이론으로 해석학을 더욱 확장시켰다.
그의 전기 『슐라이어마허의 생애』는 빌헬름 딜타이 연구자로서의 처녀작이기도 하다. 딜타이는 슐라이어마허의 일반적 해석학을 단순한 언어적 소산(所産)을 넘어, 그 배후에 있는 역사·문화, 인간의 삶의 표현을 대상으로 하는 정신과학의 기초 이론으로 승화시켰다.
3. 3. 철학
슐라이어마허는 독일 관념론에 속하는 사상가로 평가되지만, 이마누엘 칸트, 요한 고트리프 피히테,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등의 사상을 비판하며 독자적인 철학 체계를 구축하고자 했다. 그는 변증법을 중요한 철학적 방법론으로 사용했지만, 헤겔의 변증법과는 달리 대화에 기초한 열린 체계를 지향했다. 슐라이어마허에게 학문은 상반되는 명제들을 끊임없이 대화시키며 개선해나가는 과정이었다.3. 4. 윤리학
슐라이어마허는 윤리학을 이성의 본성에 대한 이론, 즉 자연과 인간 세계에서 이성이 만들어낸 결과를 다루는 과학으로 정의했다.[31] 그는 윤리학을 이론적 과학으로 보았는데, 그 방법은 물리 과학과 동일하지만 다루는 대상에서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슐라이어마허는 윤리적 과정의 목적을 자연이 마음의 완벽한 상징이자 기관이 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31]슐라이어마허는 칸트 등 이전의 윤리 철학자들과 달리 최고선(summum bonum) 개념을 다시 도입하여 중요하게 다루었다. 그는 최고선이 사회와 우주와 관련된 개인의 행동에 대한 윤리적 관점을 제공하며, 인간 전체 삶의 이상과 목표를 나타낸다고 보았다.[31] 슐라이어마허는 도덕적 행위가 개별적이면서 보편적이고, 이성의 기관이자 상징이라고 보았다.[31] 즉, 도덕적 행위는 공동체와 관련된 개인의 산물이면서, 자연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분류하고 지배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슐라이어마허는 덕을 성향(''Gesinnung'')과 솜씨(''Fertigkeit'')의 두 가지 형태로 분류했다.[31] 성향은 행위의 순수한 이상적 요소이고, 솜씨는 상황과 관련하여 취하는 형태이다. 그는 의무를 일반적 연관성의 의무, 직업의 의무, 양심의 의무, 사랑의 의무로 나누었다.[31]
슐라이어마허는 영원한 지옥은 하나님의 사랑과 양립할 수 없다고 보았다.[29] 그는 신성한 처벌은 교정적이어야 하며, 사람을 개혁하도록 설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4. 영향
슐라이어마허는 19세기와 20세기 신학, 철학, 해석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사상은 자유주의 신학뿐만 아니라 변증법적 신학, 해석학적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논의되고 있다.[39] 그는 인간을 "주체"로 생각한 최초의 신학자로, 종교를 외부의 힘에 굴복하는 것이 아닌 인간 내면의 종교 체험과 감정으로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교리를 중시하는 정통주의와 결별하고 자유주의 신학의 주요 특징이 되었다. 그는 스피노자의 범신론적 사유를 수용하여 '신' 대신 '우주'에 대해 말하고, '세계정신', '인간성', '역사발전'과 같은 당시의 주요 개념들을 수용했다. 하지만 슐라이어마허는 이러한 개념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근대정신을 수용, 비판하는 근대신학의 기틀을 마련했다.
헤르만 바빙크는 슐라이어마허의 계시 교리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활용하고, 성경을 자신의 신학적 작업의 객관적 기준으로 삼았다. 또한 기독교적 의식과 경험을 형성하는 교회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슐라이어마허 계시 교리의 잠재적 약점을 극복하려 했다.[34]
한국의 진보적 기독교계는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는 데 큰 영향을 받았다. 그의 업적은 널리 인정받아 그의 이름을 딴 소행성 (12694 슐라이어마허)이 있으며, 베를린-크로이츠베르크 지구에는 1875년 그를 기려 명명된 슐라이어마허슈트라세(Schleiermacherstraße)가 있다.
5. 비판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를 인간의 종교 체험과 감정으로 생각하였으며, 기독교의 전통 교리와 신앙고백(Creeds)를 절대시하지 않았다. 신학보다 인간의 종교 체험과 감정을 더 우선시한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은 근대 자유주의 신학의 주요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의 신학은 인간의 감정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객관적인 진리나 계시의 역할을 소홀히 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이 성서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기독교 신앙을 주관적인 경험으로 축소시킨다고 비판한다.[39]
6. 저작
슐라이어마허의 주요 저작들은 한국어로 번역되어 그의 사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주요 저작은 다음과 같다.
7. 같이 보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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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rch and Theology: The Systematic Function of the Church Concept in Modern Theology
Westminster Press
[34]
학술지
Bavinck and Barth on Schleiermacher's Doctrine of Revelation
https://www.academia[...]
[35]
웹사이트
"「シュライアマハー」という邦語名称について"
http://www.baika.ac.[...]
2023-12-10
[36]
서적
판넨베르크 조직신학I
새물결플러스
2017
[37]
문서
성서의 역사적 배경과 역사적 사실여부를 확인하는 성서해석 방법론
[38]
백과사전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39]
논문
[40]
웹사이트
지만지 고전선집, "해석학의 탄생", 빌헬름 딜타이
http://zmanz.blog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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